- 「물매화 사랑」.
“물매화. 이름을 알면서 그것이 비로소 내 인생에 들어왔다. 가지울로 거처를 옮긴 그 첫해 여름에 가장 먼저 만난 들꽃도 물매화였다. 그 가을엔 겨우 여덟 송이의 물매화를 보았다. 내가 물매화를 바라보듯 물매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중환자실 앞에서 그냥 돌아온 뒤 다시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물매화에 겹쳤다...” 어린 시절 잃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제 나이가 들었으되 말을 잃고 우울중 판정을 받아 숨어들 듯 기거하고 있는 가지울 근처에서 새롭게 발견한 물매화... 그리고 그러한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관조와 가지울 근처 왜갈봉에서 가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사내... 긴 말이 혹은 대화가 없는(혹은 필요없는), 대신 풍경이 흐르고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소설...「소양강 처녀」.
일제 강점기부터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로 알려진 추곡 마을, 그 마을에서 선생님으로 재직중이며 장수하늘소의 연구를 위해 발품을 팔고 다니는 나... 그리고 근처 추전리로 은연중 스며들어 다 죽어가는 한 사내를 살리고, 그 사내의 아이까지 떠맡아 지내다, 또 그렇게 나타난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한 여인... 장수하늘소를 찾아다니는 나와 산삼을 캔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그녀, 그런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마을 사람들... 점점 그 존재의 희박함으로 희귀함을 드러내는 장수하늘소와 부유하는 존재 같았으되 여러 사람에게 묵직한 존재감을 실어주고 떠나간 그녀의 이야기...「플라나리아」.
(1,2년전에 읽었던 듯하다) 같은 제목의 일본작가소설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흥미가 가는 생물체인 플라나리아.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을 함께 하는 플라나리아는 몸이 잘리면 그 만큼 개체수가 불어날 뿐 죽지는 않는다. 과학교사인 나는 학생들과 플라나리아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어느 날 감쪽같이 플라나리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동거하던 그네 또한 이 플라나리아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네가 사라진 정말 집을 떠난 것인지 아니면 집안 어딘가에 있지만 그저 사라져 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인지 헷갈린다. 자연과 인간, 존재의 사적인 역사성과 순간의 포착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소재인 플라나리아가 너무나 적절하게 어울려서 빈틈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대상 수상작이어도 불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아, 그리고 섬뜩함을 느꼈던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60년대 초 제임스 맥도널과 그의 동료는 플라나리아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학습시킨 플라나리아를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여서 학습된 내용이 전달되는가를 알아본 것이다. 접시에 담긴 플라나리아에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 충격을 가하자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전기 충격의 고통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 충격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면 플라나리아는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오그렸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같은 것인데 이렇게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갈아서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였다.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먹은 다른 플라나리아 역시 불빛만 비춰도 몸을 말았다. 학습된 내용이 전달된 것이다.”「온 생애의 한순간」.
표제작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의 시 「내 청춘의 영원한」으로 시작되는 소설. 곤충 사진을 찍는 여자와 홀로 산행을 즐기던 남자의 만남... “남자의 관심을 끈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두쌍무늬노린재가 되어 있는 여자의 그 지독한 몰입. 가슴을 뻑, 소리나게 얻어맞은 것처럼 남자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남자는 어떤 일에 지독히 몰입하는, 그 신명을 모르고 살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는 남자의 치명적인 한계, 그리고 자신의 일로 명성을 쌓아나가게 되는 여자라는 부수적인 조건 때문에 영원하게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속되지 못함으로 ‘온 생애의 한순간’이어서 더욱 선명한 관계에 대한 여자의 고찰...「이미지로 간다」.
‘예술이 절대 정신이라는 의미는 동시에 예술이 객관 정신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객관 정신의 표현, 그것이 곧 예술이란 얘기다.’ 헤겔의 관념의 늪에 빠진 대학 강사이기도 한 40대의 나... 인도에서 만났다는 그네의 이야기와 그와 미지의 이야기가 헷갈린다.「한주당, 유권자 성향 분석 사례」.
어딘가에서 읽은 것 같은데 어디서였는지 모르겠다. 한 중소도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정채라는 남자와 그 술집의 단골로, 또한 그 지역의 얼치기 지적 유지로 술집을 들락거렸던 닥터 박, 송암선생, 테너 장, 김영랑 교수, 주유소 최의 이야기...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보다 길어 중편이며 주인공 역을 하는 한정채라는 남자의 캐릭터가 꽤 선명하여 기억에 남는다.「너브내 아라리」.
공무원으로 일하다 부정한 사건에 연루되어 덤터기를 쓰고 감옥에 갇혔던 나... “부정과 비리의 법칙은 그 순환 관계가 명료하다. 어느 공무원이 업자의 청 하나를 마지못해 인간적으로 들어준다. 소액의 촌지가 인간적으로 주머니 속에 들어온다. 세상이 다 그런 거야. 술 한잔 걸친 공무원의 그 호기야말로 인간적이다. 뇌물이 아니면 결코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울분의 이를 갈던 업자로선 그 작은 돈이 그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황금알을 낳는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한다. 양심의 실종으로 얻어진 그 감동에 비례해 수백 수천의 피해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수백 수천의 피해자는 일구월심 이를 갈며 오로지 가해의 날만을 기다린다.” 그런 내가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들어앉았던 장항리와 그곳에서 만났던 쏘가리 최씨... ‘외진 곳이면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너브내 강’에서 낚시를 하던 나와 그곳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살고 있으며, 아주 조금씩 나와 친분을 쌓았던 쏘가리 최씨... 그리고 쏘가리 최씨의 죽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새로운 계기를 만든다.「실종」.
“나는 항상 가벼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증발되는 것을 꿈꾸었다. 내가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남의 일처럼 귀에 들려오는 그런 꿈이었다. 오랜 세월 나를 사로잡았던 그동안의 갖가지 실종 미스터리가 내가 꿈꾸는 실종의 시나리오 만들기에 도움을 주었다... 실종증후군의 또 하나의 증세는 내가 실종된 사람들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기를 내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종자의 행방이 그 시신 찾아내기 등으로 밝혀진 날은 심한 두통에다 하루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불안 증세를 보였다.” 1980년 이후 40만명 증발, 1990년 이후 4년간 경찰에 신고된 가출 인구는 모두 13만 1천69명... 젊은 시절 나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병하의 실종,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교장 선생의 실종,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의 실종자... 그리고 치매 속에서도 실종자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집착 증세를 보이는 나의 노모와 한 아파트에 기거하는 계단을 기어다니는 할머니...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점차 기력을 잃어가는 기억과 끝끝내 기억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실종의 이야기... - 『온 생애의 한순간』에서 사람들은 거듭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숨는다. 「너브내 아라리」에서 쏘가리 최씨는 반공포로라는 그의 이력이 불러오게 될 사회적 박해를 피해 장항리라는 오지 마을에서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제목 자체가 「실종」인 소설에서는 30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를 둔 두 실종 사건이 겹쳐지면서 실종이라는 테마의 역사성은 우리 삶에 집요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 「이미지로 간다」에서 미지라는 인물의 죽음으로 형상화된 실종의 테마는 상실의 고통과 이것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사이의 간극이 펼쳐내는 정신적·물리적 공간 속에서의 방황의 몸짓을 낳기도 한다. 이보다 단순하게 「온 생애의 한순간」 「플라나리아」 「소양강 처녀」 등의 작품들에서 실종이라는 테마는 사귀거나 같이 살던 여자의 떠남이라는 행위로 구체화되고, 「물매화 사랑」에서의 그것은 「너브내 아라리」와 비슷한 은둔의 형태를 취한다. 이렇게 『온 생애의 한순간』에 수록된 거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실종의 테마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물을 차례일 것이다. 그들은 왜 숨고 사라지는가?
일상이라는 벽을 부수고 투명한 언어로만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을 찾아서
『온 생애의 한순간』에 수록된 전상국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실종’이라는 테마로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죽음을 포함한 실종들은 일상성이라는 삶의 질서를 반성하게 만들고 그것에 길들여져 굳어지거나 이완된 의식에 금이 가게 만든다. 예컨대 「소양강 처녀」에서 한 여인의 사라짐은 일상적 질서 아래 감춰져 있던 욕망의 층위가 한 꺼풀씩 드러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된다. 「너브내 아라리」에서 쏘가리 최씨의 죽음은 타락한 세계에 길들여져가던 주인공에게 “어느 때 어떻게 죽어야 다른 사람 속에 되도록 오래 머무를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남기며 회사에 사표를 던지게 만든다.
작가가 이렇듯 실종의 테마에 집착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굴절되고 분화되는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포착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온 생애의 한순간』을 통해 연쇄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물음들은 거칠게나마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일상성의 공간은 어떠한가? 과연 그것은 우리의 실존적 도약을 약속하는 성취의 장인가, 아니면 그것을 좌절시키는 감옥인가? 만약 후자라면 거기서 벗어나 존재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해방의 통로는 있는가? 과연 어떤 방식의 삶이 그 탈출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온 생애의 한순간』의 인물들을 떠나게 하고 숨게 만드는 근본 동기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플라나리아」)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로 표현되는 삶은 범속함과 무의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작중인물들의 떠남과 실종이란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난다는 의미를 지닌 동시에 타락하고 불완전한 언어로부터의 탈출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삶을 범속함과 무의미함에서 구해내려는 실존적 도약의 시도로서의 실종은 따라서 진실한 창조와 생성의 언어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동행하게 된다. 「물매화 사랑」에서의 그녀는 고부간의 갈등과 부부 ... -
6·25전쟁으로 인한 실향의식과 삶의 뿌리찾기의식 등 체험을 토대로 한 깊이 있는 주제를 작품화함으로써 엄숙주의적 경향을 띤 작가로 평가받는 소설가 전상국 씨가 9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새 소설집.
1997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전상국의 글쓰기를 이끌어온 테마 '실종'을 중심으로 하여 각 작품이 동심원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거듭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숨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온 생애의 한순간』은 일상성의 공간이 우리의 실존적 도약을 좌절시키는 감옥인지 묻고 만약 그렇다면 거기서 벗어나 존재의 전환을 이룰 해방의 통로는 있는지, 또 어떤 방식의 삶이 그 탈출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2003년 이상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 「플라나리아」, 표제작으로 곤충들을 찍으러 다니는 여자와 건축 회사를 다니는 남자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온 생애의 한순간」 등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많은 사람들이 혼잣말처럼 대답을 되뇌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새삼스레 잃어버린 꿈을 찾아나서기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찾아나서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 상당부분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잠깐 스스로 ‘실종’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구태여 그런 방법밖에 없을까’라는 물음에 작가 전상국의 소설집 ‘온 생애의 한순간’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작가가 말하는 것은 우리를 매몰시키고 있는 일상에서의 탈피를 뜻한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은 오히려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실종’이 어울릴 정도로 ‘사라짐’이 전체 테마를 이룬다. 부분적으로 ‘한주당, 유권자 성향 분석 사례’와 같이 세태를 풍자한 작품도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한결같이 등장인물들이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숨어버린다”. 물론 사라짐이 화자(話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 인물이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사라짐에는 대개 부재(不在)에서 오는 고통이나 깨달음이 배어 있다. 이것 역시 일상성과 관련이 있다. 항상 보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부재는 일상성의 파괴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일상성이 파괴될 때 고통을 느끼거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소설집에서 간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생소한 동・식물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매화를 유심히 관찰한다거나(물매화), 장수하늘소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거나(소양강처녀), 무성생식하는 편형동물 플라나리아로 실험을 한다거나(플라나리아), 곤충들의 교미장면을 주로 찍는다거나(온 생애의 한순간) 그런 식이다. 게다가 배경 역시 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이거나 산이다. 동・식물도감이나 백과사전을 뒤지지 않는 한 일반인들에게, 특히 도시인들에게 이름도 생소하고 생김새 또한 낯선 이들 자연물은 사라지거나 숨은 등장인물들과 합치된다. 어찌 보면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고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이들 동・식물은 등장인물이 꿈꾸는 삶이다. 그것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들에 몰입된다. 자연과 일치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물들이 사라지거나 숨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1963년 단편 ‘동행’으로 등단한 전상국은 ‘우상의 눈물’ ‘아베의 가족’ 등으로 1980년대의 한국소설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의 초창기 작품경향을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폐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다룬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교직생활에서 체득한 교육현장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들이다. 전자의 대표작으로는 ‘동행’ ‘아베의 가족’이 속하고 후자의 대표작으로는 ‘우상의 눈물’을 꼽는다. 전상국이 9년 만에 낸 소설집 ‘온 생애의 한순간’은 이 두가지 경향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작품 제목처럼 그 길에 간접 ‘동행’하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듯하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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