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의 매혹 - 장 그르니에-

 

空의 매혹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무엇보다도 그 삶의 첫 시기에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 순간을 다시 맞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수많은 시간들의 퇴적 아래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시간들이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는 것은 정말 섬찟하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언제나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걸쳐 내내 지속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지없이 평범할 뿐인 세월들을 오묘한 무지개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서 새벽빛이 결코 그들에게서는 떠오를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들이 문득 수의壽衣를 떨쳐 버리면서 나자레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수의란 다만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여러 해에 걸쳐 세월 위에 펼쳐진 이 아련한 꿈과 같은 기억이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세상이 비어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런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나의 존재가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르고, 그 후에 내 자신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던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과 관련이 있다고 돌이켜 볼 수 있을만한 그런 특별한 순간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기이한 상태를 매우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런 상태란 그 어떤 것도 예감이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다만 계고戒告였을 뿐이다. 그런 상태를 겪게 될 때마다 나는 늘 시간의 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내 손으로 건드린 것 같았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그 접촉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런 접촉들과 어떤 관계를 지어 보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요컨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외부세계와 비교하고 자신의 직관을 하나의 체계로 - 그 직관들을 고갈시켜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유연한 하나의 체계로 변형시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해야 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꽃송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시들어 떨어지듯이 그런 만남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하나의 꽃에서 다른 꽃으로 달려갔을 뿐이었다. -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없는 그런 여행들.

  그때 내 나이 몇이었던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으리라. 어느 보리수나무의 그늘 아래 길게 누워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하늘이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삼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무無에 대해서 처음으로 느낀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요롭고 충만한 실존의 인상에 바로 뒤이어 느껴진 만큼 더욱더 생생한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왜 한 가지가 또 다른 한 가지에 뒤이어 나타나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했다. 자신들의 마음과 몸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능으로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 소위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훨씬 더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은 파멸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空洞이었다. 그 벌어진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완전히 아주 삼켜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 아주 사소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라고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 어쨌든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끊임없이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가 어느 때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살아간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왜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어쨌든 나는 그 <주변>에서 살아야 했다.

  모든 사물들이 헛되다는 생각은 나의 마음 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늘상 바다와 가까이 살았고 바다는 늘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브르따뉴의 바다가 그렇듯이 늘 출렁이며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바다 말이다. 브르따뉴에서는, 어떤 만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한 눈으로는 다 껴안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있었다. 그 얼마나 광막한 공간인가! 바위들, 붉은 뻘, 물.... 날이면 날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풀이되는 질문이었고,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밤이면 어느 조각배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 줄 표지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길을 잃었다, 돌아갈 수도 없이 갈 길을 잃은 것이다. 더구나 하늘에는 별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몽상 따위로 인해서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 몽상들을 기꺼워하며 받아들였다. 내가 그런 이야기와 관계된 글을 읽은 적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것은 <문학적인 병>이 아니었다. 그 병은 차라리 생래生來적인 것이었고, 나는 그 병을 더없는 즐거움으로 삼았다. 무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여전히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마치 무無에 대한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거기에서 거의 완전한 무심함이, 맑고 깨끗한 무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잠자고 있는 사람의 상태와 같았다. 나는 날이면 날마다 그 우울한 평원을, 결코 씨앗 한 톨 싹트지 않을 거칠고 메마른 모래톱을 달려가곤 했다. 나는 물결에 실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밀려왔다가 다시 저 멀리 사라지는 물결은 결국 나를 제 자리에 내버려 두곤 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단단한 밧줄로 묶인 채 꼼짝도 않는 부표浮漂와도 같이, 그와 같은 무력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 무력감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그 무력감을 오히려 쾌감을 느끼며 견디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전혀 그 무엇에도 이르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무엇이건 다른 어떤 것과 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무력감에는 아무런 출구가 없었다. 만일 그런 무력감의 끝에 죽음이 있었다고 해도 나의 삶은 또한 죽음과 다를 바가 없어서 그 차이를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을 때 몸의 경련을 일으키는 동물의 본능밖에는.

  그와 같은 기질을 가진 내가 모든 것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그 사실은 어찌된 일인가? 나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일이 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단 한 가지와 비교해 보면 어떤 가치 - 보잘것없긴 하지만 - 를 지닌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므로 무관심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사실 완전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신을 보호해 주는 어떤 중립지대에 스스로를 가둘 수도 있다. 그것은 곧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며 또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신을 이 세상에서 다를 바 없는 모든 것과 같은 대열에 두고 생각하고 이 세상이 비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면, 삶을 통해서 일어나는 온갖 시시한 일들에 혐오감을 느낄 만한 일이다. 상처 하나쯤이야 그래도 괜찮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상처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상태는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폭넓게 바라보자면 생존은 비극인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자면 그 생존은 터무니없이 몹시 초라하기까지 하다. 살아가노라면 그 생존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두 번 다시 알아채지 못하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또다시 빠져 들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과 <저것>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수도 있다. 한 가지를 소유하고자 영원히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과연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無心>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그 유희에 스스로 빠져 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하나의 절대성을 찾으려고 한다. 침묵하거나 무시해 버리기는커녕,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어떤 갈등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다. 상표가 다른 두 개의 만년필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해서 가장 비싼 것일 리는 없다. 가장 좋지 못한 것이 다만 다르다는 이유로 해서 커다란 몫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가장 좋지 않은 것도 있을 리 없다. 이런 때에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때에 좋은 것이 있으므로. 그러므로 내가 알기에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이 세상에 들어온 이상,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우리는 가장 교활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이렇게 살아 있는데, 어째서 살려고 하지를 않는 거지? 어째서 가장 좋은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지? 라고 우리의 귓가에서 속살거리는 그 악마의 유혹을, 이렇게 되면 달리기도 하고, 여행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채워지려는 그런 순간들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空의 매혹이 어떤 달리기로 이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한 발을 들고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게 하는 것도 그렇다. 그때 두려움과 매혹이 뒤섞인다. 앞서 나가기도 하고 동시에 피해 달아나기도 한다.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영원히 되풀이되는 이 움직임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어떤 날이 오기는 온다. 곧 말없이 어떤 풍경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된다. 홀연히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대신 들어오게 된다.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그것은 오로지 그와 같은 신적神的인 순간들에 이르려고 했던 어렵고 힘든 노력이었을 뿐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 땅에 반듯이 누워서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느라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해서 바라보았던 저 청명한 하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내가 그 순간들에 이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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