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긋기

가면의 고백 - 미시마 유키오

 

 

 

엘 그레코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소설속의 사내가 열세살 때에 본 구이도 레니의 성세바스티아누스 순교도를 보고 빠져들었다는 그림을 보고 싶었지만.                                    
 유키오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은 금각사였다. 그 후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내게 어떤 의무감 처럼 읽어보고 싶게 했던 것 같다.

그 수려한 문체와 수사, 한치의 흐트럼없는 풀룻과 차분한 심적변화와 탐미적인 아무튼 난 단번에 그에 글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이 소설은 금각사 만큼의 감동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도 복잡하고 다양한 성향의 성장통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허지만 난해하고 복잡한 성향의 주인공을 모두가 공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면의 고백이 대한민국의 여성 독자들에게 과연 어떠한 감상을 지닐지 궁금하다는

 허호 교수의 말에 독자로써 한마디 한다면 샤디즘경향이 있는 한 사람을 소설이라는 허구를 바탕으로 자전적인 요소를 버무렸겠지만  작가의 말처럼

"정신적 위기에서 생겨난 배설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소설의 부조리한 욕망을 바탕으로 남성 성장통소설로 읽혀나가기엔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백적 성장소설의 하나라고는 말하고싶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이성에 눈뜨기전의 불안정한 시기에 일반적 일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출생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정 및 주변환경과 결부시켜 논리적으로 피력한 것 자체가 당시 일본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겠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심미주의 세계관에 다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가면의 고백이라고 했겠지만.  그러므로 난 그에 가면을 들춰본것 같아 그져 씁쓸햇다.

 

 

나는 이 세상에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음을 예감했다.

지저분한 몰골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

 저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그 욕구에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 또렷하게 생각난다.

 한 가지는 그의 감색 작업복이고, 또 하나는 그의 직업이었다. 감색 작업복은 하반신의 윤곽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감색 작업복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p. 18)


겐로쿠 시절의 우키요에 판화에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얼굴이 놀랄 만큼 닮게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 조각에서 표방하는 미의 보편적인 이상도 서로 닮은 남녀에게로 향했다. 여기에 사랑의 비밀스러운 의미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상대를 닮고 싶다는 불가능한 열망이 흐르는 게 아닐까.

이 열망이 인간을 몰아세워서,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반대의 극점으로부터 가능하게 만들려고 무익한 몸부림을 치는 저 비극적인 이반(離反)으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즉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서로 닮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서로 조금도 닮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한 이반을 그대로 환심을 사는 데 이용하려는 심리적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닐까.

더구나 서글프게도 서로 닮는 것은 한순간의 환영인 채로 끝나버린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소녀는 과감해지고 사랑하는 소년은 내성적이 된다고 해도,

그들은 서로 닮으려고 애쓰다가 언젠가는 서로의 존재를 건너뛰어 저 너머로, 이미 대상도 없는 저 너머로 떠나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p. 82~83)


나는 그 복사본을 받아 들고 다 읽기도 전에 사실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게는, 단지 나에게만은 무서운 나날이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를 부르르 떨게 만드는, 게다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속여왔던

인간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이제 어쩔 도리 없이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p.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