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카프카, 아베 코보 내가 만난 사막을 생각하게 한다.
한 남자의 실종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나에게 인간의 의미를 묻는다
이 세상 어딘가에 거대한 모래 구렁속의 마을이 있고, 밤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들은 매몰되고 묻혀버린다.
한집만 방심해도 도미노처럼 마을이 묻혀버리므로 모래를 퍼내는 것은 마을의 공동윤리이고 절대 의무다. 주민들은 모래의 강박증과 싸우며 목숨을 부지하느라 자아를 상실한지 오래이며, 어쩌면 그런 마을엔 애초부터 자아같은 건 유전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오직 하루하루 모래와의 고투를 치르는 곤충 같은 삶이 있을 뿐이다.
음식에 뒤섞이고, 물에 가라앉고, 옷 속에서 지그럭거리고, ... .
절대적인 단절과 폭력을 행사하는 모래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모래의 여자처럼, 이제 남자도 모래의 유동에 순종하며 생의 모든 정형의 요소를 지워낸다. 사막에 사는 곤충들이 그 폭력과 단절을 수용하고 긴 시간을 두고 조금씩 자신을 변형시켜온 것처럼, 그도 그녀와 마을 사람들처럼 이제 흘러내리는 모래를 그 한없는 중압감과 단절, 고독, 공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제 모래 속의 남자는 모래의 남자가 되어 여자와 신천지를 만들어 간다. 자연에 대한 여인의 야만스러운 복종에 기꺼이 동참하여 그도 벌거벗은 채 본능을 불태운다. 모래의 여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살아남기만을 위한 ...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모래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 한 남자를 통해 현실에서 도망가고자하는 우리들의 초상을 말하는 듯, 아니 우리가 숨을 곳이라곤 없다는 말을 하고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살면서 얼마나 많이 우리는 현실을 기피하는가, 여행을 가고, 칩거를 거듭하고, 또는 다른 방법으로 일상을 탈피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말이다. 미치겠다고, 답답해 죽겠다고.현실에서 도망가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 남자가 고립된 허구의 모래 언덕 마을은 어쩌면 인간 존재를 버리는 것이라고.
모래밖은 현실과 환상이라고.
너무도 상투적이지만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하면 산다는.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마지막 남자가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탈출을 뒤로 미루는 대목은 뭐랄까 폭력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이미지같다.
학교 선생인 한 남자가 어느 날, 곤충채집을 위해 사구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사구란, 생명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은 땅에서도 모질게 살아남는 곤충을 채집하여,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여행은, 그 남자를 이 세상에서 실종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남기고자 한 그 행위가 그 자신을 채집함으로써 완성되는 대신,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사구의 모래 구멍에 갇힌 남자의, 이 세상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 절규는 이 모순을 각성시키려는 모래의 노래가 된다.
모래구덩이에 갇힌 주인공이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도록 매일매일 삽질을 한다. 그 반복적인 행동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무수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도, 항상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현실로부터 도망해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올 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한한 반복을 해야하는 삶의 형태는 희망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도 아니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모래로 양분되었던 이 세계와, 밖의 세계는 한번 비튼 종이 테이프의 양 끝을 둥그렇게 붙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없는 공간을 뜻하고, 이 공간에 대한 복종과 수용이 모래여자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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