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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시인의 언어로 써 내려간 나보코프 산문의 정점
모던 라이브러리 위원회 선정 20세기 100대 논픽션


20세기 문학의 거장이 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자서전. ‘우리 시대 최고의 자서전’ 혹은 ‘가장 예술적인 자서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보코프의 탐미적인 언어는 기억의 단편들을 불러내 정지화면으로 포착하고 그 순간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그의 가족과 집, 러시아 숲 속의 밝은 햇살과 그 속에서 그가 쫓아다니던 온갖 나비들, 먼 곳에 두고 온 옛사랑, 20년의 젊은 날들을 바쳐 적어 내린 러시아어 소설들과 같은 모든 것들. 영영 사라져 버린 그것들을 나보코프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 의지해 시간을 초월한 무아경 속에 놓는다.

존재를 드러내는 개인적인 기억들의 아상블라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20세기를 목전에 둔 1899년 4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국식 문화에 젖은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던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가정교사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았으며, 러시아어를 읽기 전부터 영어 읽는 법을 배웠다. 소년 나보코프는 러시아의 도시와 시골 및 유럽 휴양지를 오가는 윤택한 생활 속에서 나비와 나방 채집을 즐겨 했으며, 사랑에 빠져 시를 짓는 행복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가 첫 시집을 출간할 즈음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로 1919년 가족과 함께 크리미아로 도주한 나보코프는 이어 베를린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영국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러시아 문학과 프랑스 문학 공부를 끝마칠 무렵,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러시아 극우파에게 암살을 당하였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1925년부터 이후 약 15년의 세월 동안 나보코프는 시린이라는 필명의 작가로 활동하며 망명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여섯 편의 소설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었기에, 외국어나 테니스, 복싱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1938년 나보코프 가족은 나치가 점령한 독일에서 파리로 이주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인 1940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보코프의 어머니는 세계 대전 발발 전날 프라하에서 이미 죽은 뒤였고, 파리에 남겨 두고 온 남동생 세르게이는 1945년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나머지 세 명의 동생들과는 약 20년 후에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40년 뉴욕에 다다랐을 당시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 곳곳의 넓은 영토와 저택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루아침에 조국을 잃고 갈 곳이 없어진 가족들은 낯선 땅에서 하나 둘씩 죽어갔다. 방랑의 20년 세월을 버텨 가며 탄생시킨 러시아어 소설들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그의 러시아어를 읽어 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나보코프가 첫 영어 소설인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을 출간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가고 바로 이듬해인 1941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칠팔 년의 세월 동안 나보코프는 한 편의 영어 장편소설과 수편의 영어 단편소설들을 썼으나, 소수의 독자층을 거느리게 된 것 외에는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바야흐로 새로운 문학 인생을 꾸려가야 한다는 거대한 숙제가 있었으나, 이에 전념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보코프는 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하거나 박물관에서 나비 연구를 하며 지냈고, 동료 교수들이 잠시 비워 둔 집들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던 중인 1947년 4월, 나보코프는 친구 에드먼드 윌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두 개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1. 어린 소녀들을 좋아하는 한 남자에 관한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바닷가 왕국’이 될 겁니다. 2. 새로운 유형의 자서전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얼키설키 얽고 있는 실타래를 모두 풀어 가는 과학적 시도가 될 겁니다. 가제는 ‘의문의 사람’입니다.

첫 번째 작품은 점점 분량이 늘고 깊어졌으니, 결국엔 나보코프를 경제적 곤궁함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미국 문학사에 새로이 새기게 될 문제작 《롤리타》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은 자그마치 십여 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출간된 그의 자서전이 되었다.

저 찾아보기의 창 너머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미국에서의 첫 작품《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에서부터 자서전《말하라, 기억이여》까지 나보코프의 문학적 행로는 한결 같았다. 그는 한 사람의 삶을 수기 또는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예술의 진정성이라는 문제를 깊이 숙고하고자 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드러내는《말하라, 기억이여》또한 이러한 예술의 진정성에 관한 고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나보코프는 자신을 주인공 삼아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을 써 내린 것이다.
롤리타를 영영 잃은 험버트는 그녀와 영원 속에 남게 될 최후의 방법으로 자서전 집필을 택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죽지 않는 유일한 길이야, 나의 롤리타.’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안에 갇힌 비극적 존재라는 면에서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 여기 소설가 나보코프가 있다. 그는 책상에 앉아 ‘바닷가 왕국’을 집필 중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거대해질지를 아직은 알지 못하는 그의 주인공 험버트가 그곳에 있다. 그는 잃어버린 과거에 신음하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움켜쥐려고 발버둥친다. 나보코프는 짧게 신음한다. 그의 주인공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잠시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는 종이에서 시선을 돌려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에서 잊혀진 잔상들이 떠오른다. 푸른 파도, 젖은 모래, 그 더운 모래를 더듬는 고사리 같은 손……,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손이다. 그리고 거기 잃어버린 자신의 소녀가 있다. 소녀가 그를 본다. 그는 안도한다. 그녀가 있다. 그녀는 아직 험버트의 것이 아닌 그의 것이다……. 잠시 후 침묵 속에 눈을 뜬 소설가는 다른 종이 위에 연필을 미끄러뜨린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적는 중이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적고, 적은 진실을 확인하며, 그 의미를 상상한다. 자신의 이야기지만 그는 상상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내일의 험버트를 예견하듯이 자신을 예견해 온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상상해야 함을 뜻한다. 그의 가족과 집, 러시아 숲 속의 빛나는 햇살과 그 속에서 그가 쫓아다니던 온갖 나비들, 먼 곳에 남겨두고 온 옛사랑, 20년의 젊은 날을 바쳐 적어 내린 러시아어 소설들과 같은 그 모든 것들.
영영 사라져버린 그것들을 그는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그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서툰 기억과, 그 기억의 말을 담을 얇은 종이와 연필뿐이다. 험버트와 나보코프가 본질적으로 같다면 오직 이러한 점에서다. 그러나 이 문제를 헤쳐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험버트와 완전히 달랐다. 불완전한 기억이 완전한 것인 양 모든 것이 진실인 척하는 험버트와 달리, 나보코프는 제 기억의 틈새를 드러내고 또 드러내는 새로운 유형의 자서전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비평은 그의 작품을 ‘기억의 예술’이라고 부른다(이 책의 <찾아보기>에는 본문에 나온 밀류코프, 제르진스키, 야고다 같은 러시아 정치가들의 이름이 없다. 대신 나보코프는 제 집에 살던 요리사, 가정부, 집사, 운전수 등의 이름을 집어넣고 있다. 나보코프가 <서문> 말미에 쓴 대로 ‘저 찾아보기의 창 너머로/ 한 송이 장미가 오르고 / 흑해로부터 이따금 /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방문객들로 하여금 여행하도록 하라. 이때에 아무렇게나 골라진 풍경처럼 시간이 없는 상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란, 마치 내가 드문 종의 나비들이나 그들의 먹이 동산 한가운데 서 있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무아경이다. 그리고 그 무아경의 뒤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6장 <나비들>, pp. 171-173.)

순간적인 진공, 그것은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자연의 상태를 거부하는 나보코프만의 시공이다. 그만이 가진 기억, 그만이 할 수 있는 상상과 이해만이 이 시공을 존재케 할 수 있다. 그곳에 있는 느낌을 나보코프는 ‘무아경’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최상의 즐거움’ 속으로 오라며 독자를 유혹한다.
생존을 위해 의태를 하는 애벌레처럼, 무의미하게 잊히고 싶지 않았던 작가 나보코프는 제 새로운 언어 뒤에 숨어야 했다. 겉보기에 그것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였고, 수수께끼를 품은 정교한 무늬의 그림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꿈꾸던 그의 기억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는 진공’ 속에서 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보려 했다. 결국 그의 기억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가 죽은 뒤에도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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