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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 미사마 유키오

Chez simo 2009. 5. 9. 19:19


 

미시마 유키오 이 남자에게 반했다.

 

 

1950년 7월 2일에 일어났던 *로쿠온지[鹿] 방화사건을 바탕으로 "금각사"라고 하는 작품을 완성한 미사마 유키오의 섬세한 글 솜씨에 반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방화사건의 범인인 하야시 쇼켄은 실제로 금각사의 도제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하야시가 말더듬이라는 점과 , 범행 동기 중에서 "아름다운 금각에 대한 질투"라고 진술한 부분에 초점을 두고 미조구치라는 주인공을 창조했다. 미조구치는 어려서부터 말더듬이였다. 학교에서는 절의 아이라는 사실까지 포함해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에게 있어서 '미'는 자신과 외따른 곳에 있는 존재였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는 점차 그의 미적 가치관 속에 금각이 자리를 잡는다.
 미조구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각을 본다. 그리고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금각은 아름답지 않았다. 미의 기준이었던 금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금각을 미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성장하며 불가피하게 현실과 마찰을 일으킬 때, 금각은 항상 그곳에 있어 그를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는 금각을 견딜 수 없이 사랑했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금각을 증오했다. 그는 마지막에 가서 현실을 택했으며 미와 작별을 고한다.

 

" 말이 아마도 이 상황을 구제할 수 잇는 유일한 수단이리라고, 여느 때처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특유의 오해이다. 행동이 필요한 때에, 언제나 나는 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 입에서 나는 말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스다가 행동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행동이라는 휘황찬란한 존재가, 언제나 휘황찬란한 말을 동반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증인만 없다면,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 사건이란 우리들 기억 속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실추하고 만다."

 

"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끊임없이 내 얼굴의 한쪽에만 퍼붓는 그 엄청난 빛, 눈부신 그 모멸......"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가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 어린애 같은 떼거리는 쓰지마" 하고 가시와기는 비웃었다. "나는  너에게 일러 주고 싶었다구, 이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인식이라고, 알겠냐, 다른  것들은 무엇 하나 세계를 바꾸지 못해. 인식만이 세계를 불변인 채로, 그대로의 상태에서 변모시키지, 인식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영구히 불변이고, 또한 영구히 변모한다구,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너는 말하겠지, 하지만 이 삶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은 인식을 무기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동물에게는 그런건 필요없어. 동물에게는 삶을 견딘다는 의식 다위는 없으니까, 인식은 견디기 힘든 삶이 그대로 인간의 뮈가 된 거지만, 그러면서도 견디기 힘든 것이 조금도 경감되지 않아 그것뿐이야"

"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잇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나머지는 광기나 죽음이지."

 

"과거는 우리들을 과거 족으로만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과거 기억의 여기저기에는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강철로된 용수철이 있ㅇ더서, 그것에 현재의 우들이 손을 대면, 용수철은 곧바로 늘어나 우리들을 미래 쪽으로 퉁겨 버리는 것이다."

 

미조구치가 말더듬이인 것은. 언어능력에 자애를 지녔기 대문에 인식의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결국은 행위자로서 인생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안짱다리인 가시와기는 보행이 불편한 관계로, 결코, 행위자가 될 수는 없는, 필연적인 인식자임을 상징한다.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平岡公威].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20세기 일본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다. 고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에 있는 귀족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에 다녔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신체검사에서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군수품공장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종전 뒤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948~49년에는 일본 대장성(大藏省) 금융국에서 일했다. 첫 소설인 〈가면의 고백 假面の告白〉(1949)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적(性的) 취향을 감추어야 하는 한 동성연애자를 비범한 문체로 묘사한 자전적인 성격을 띤 작품이다. 이 소설로 커다란 명성을 얻은 뒤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
첫번째 성공의 여세를 몰아 여러 편의 소설을 잇따라 내놓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여러 가지 신체적 문제나 심리적 갈등으로 괴로워하거나, 이룰 수 없는 이상에 사로잡혀 일상의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목마름 愛の渴き〉(1950)·〈금지된 색 禁色〉(1954)·〈파도소리 潮騷〉(1954)가 이런 작품에 속한다. 〈긴카쿠사 金閣寺〉(1956)는 어린 사미승이 유명한 건물인 긴카쿠의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못함을 고민하던 끝에 긴카쿠를 불태워버린다는 이야기이다. 〈향연이 끝난 후 宴の跡〉(1960)는 중년의 사랑과 일본 정치의 부패라는 2가지 주제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장편소설·단편소설·수필 외에도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일본 전통 연극인 '노'[能]의 형식에 따라 현대판으로 개작한 희곡도 썼다. 희곡엔 〈사드 후작 부인 サド侯爵夫人〉(1965)과 〈근대 노가쿠집 近代能樂集〉(1956)이 있다.
마지막 작품 〈풍요의 바다 豊饒の海〉(1965~70)는 4권으로 된 역사 이야기로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봄눈 春の雪〉·〈달아난 말 奔馬〉·〈새벽의 절 曉の寺〉·〈천인의 쇠퇴 天人五衰〉 등 서로 독립된 4편의 장편소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1912년부터 1960년대까지의 일본을 무대로 하고 있다. 각각의 소설은 같은 사람이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즉 1912년에는 젊은 귀족으로, 1930년대에는 정치적 광신자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때에는 타이의 공주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사악한 어린 고아로 환생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날이 갈수록 피와 죽음 및 자살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미시마 자신의 정신상태, 자멸적(自滅的)인 성향을 지닌 인물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대생활의 불모성에 대한 거부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미시마의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부를 감각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 소설이지만, 견실하고 능숙한 구성과 치밀한 심리 분석 및 과장되지 않은 익살로 인해 외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작품집 〈한여름의 죽음 眞夏の死〉(1966)에 실린 단편 〈우국 憂國〉은 그의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는 소설로 자신의 종말을 예언한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할복자살하는 젊은 장교를 존경 어린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옛날 일본의 엄숙한 애국심과 무사정신에 깊이 매혹되었던 그는 전쟁 뒤의 풍요로워진 일본 사회와 물질주의적이며 서구화된 일본 국민을 여기에 대비시켜 비난했다. 그 자신도 이들 서로 다른 가치관들 사이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생활에서는 본질적으로 서구식의 생활방식을 유지했고 서구 문화에 대해 폭넓은 지식도 갖고 있었지만 일본이 서양을 모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되게 비판했다. 그는 일본의 전통 무술인 가라테[空手]와 검도를 부지런히 연마하는 한편 무사정신을 보존하고 좌익 봉기가 일어나거나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해올 경우 천황(일본 문화의 상징)을 보호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생각으로 약 80명의 학생들을 모아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다테노카이'[楯の會]라는 사병대를 조직했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풍요의 바다〉의 마지막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4명의 '다테노카이' 추종자들과 함께 도쿄 시내 근처에 있는 육상 자위대 본부에 들어가 총감실(總監室)을 점거했다. 그는 발코니에서 밖에 모인 1,000여 명의 자위대원들에게 10분 동안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전쟁과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 헌법을 뒤엎으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미시마는 전통적인 방식, 즉 칼로 자신의 배를 가르면 옆에 서 있던 추종자가 목을 치는 방법으로 할복자살(셋푸쿠[切腹])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많은 억측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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