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통신 -박정대
목련통신
1. 어느 죽음의 기록
비정성시 대만 158분 후 샤오시엔
시티 라이트 미국 90분 챨리 채플린
집시의 시간 유고 138분 에밀 쿠스트리차
블레이드 런너 미국 117분 리들리 스코트
컴 앤 씨 소련 142분 엘렘 클리모프
황토지 중국 89분 첸 카이게
몽콕하문 홍콩 90분 왕가위
목련응시 한국 36분 박 윤
2. 목련응시
아무 말 없이 목련을 바라보네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점점이 돋아나는 몇 점의 불빛들, 사랑하는 것들 모두 떠난 뒤에 기침처럼 남아 있는 목련을 보네 琉璃의 밖은 어둡고 유리의 안은 더 어둡네 內外를 불문하고 세상의 봄은 환한 폐허 위로만 오네 그 폐허를 밟아 가는 내 눈동자의 그림자 아득히 어두워질 때 난 자꾸만 목련 쪽으로 기울고 싶네 목련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 늦은 망명 정부의 불꽃 다시 피우고 싶네
3. 숨결 속에서
나는 나뭇잎처럼 아프게 될 것 같다 그대여, 아무래도 나는 나뭇잎처럼 퍼렇게, 퍼렇게 멍들며 아프게 살아갈 것 같다 그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노래를 잊었네 잊혀진 노래 사이로 바람이 불어 나, 나뭇잎처럼 얇은 가슴 하나로 펄럭였네 가면을 벗어버리고 숨소리조차 한없이 떨고 있었네 누가 나의 숨소리를 함부로 사랑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그대의 침묵 앞에서도 깃발처럼 펄럭이는데 그대여, 조용히 나에게로 와서 내 핏속을 강물로 흐르는 그대여 노래를 잊은 곳에서 나,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푸른 한 잎의 섬으로 돋아 나노니 이 한없이 쓸쓸한 숨결을 누가 사랑이라고 하겠는가 아, 나는 가면을 벗어버린 시라노 드 베르즈락 그대를 보는 순간 한숨의 거미줄에 사로잡힌 아픈, 사랑의 現存
4. 검은 소파 위에서
내가 검은 바지를 입고 오래도록 앉아 있을 때 햇살은 자꾸만 쳐들어오고 삭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와르르 와르르 자꾸만 무너진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지 말아야 하는가 아프지 않은 것들은 아픈 것들의 나뭇가지, 아픈 잎사귀들을 자꾸만 바람에 버린다 노래하는 자, 더 이상 노래 부르려 하지 않는 자, 바야흐로 이제 막 목련꽃 질 무렵이다, 퇴각하는 남부군처럼
5. 그토록 차디찬 음악 속에서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나무들과 함께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나뭇가지에 걸린 검은 구름들이 울고 있었네 무언가 서러운 일이 있었다는 듯 울고 있었네 우는 구름 아래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갈 길을 잃은 듯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 있었네 주머니 속에서는 성냥과 담배가 젖어가고 視線 속에서는 고양이와 새들이 젖어갔네 젖은 지붕들 위로 비가 내리고 젖은 지붕들이 울고 있었네 우는 지붕 위에서 누군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네 빗줄기의 현을 오래도록 켜고 있었네 아름다운 노래가 될 때까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침묵의 나무 둥치 곁에 서 있었네 그가 찬 손목 시계는 오후 두 시에서 젖어들고 있었네 秒針들은 습기를 밀어내며 힘들게 회전하고 있었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멀리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연인들은 빗속을 뚫고 골목길로 사라지고 나무들은 추운 듯 자꾸만 몸을 떨었네 몸을 떨 때마다 잎사귀들의 눈물이 떨어졌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차들은 흙탕물을 튕기며 컴컴한 오후로 달려갔네 추억의 커피들은 식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온몸을 웅크렸네 누군가 빗속에 춥게 서 있었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네 누군가 빗속에 떨면서 서 있었네 그의 턱에선 턱의 눈물이 떨어졌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그토록 차디찬 빗속에서, 음악 속에서, 폭풍우의 질책 속에서
6. 어느 봄날의 저녁
봄날 저녁이지, 마음의 한켠에선
간짜장처럼 쏟아지는 어둠을 비빈다
식욕이여, 황폐해질수록 아름다운 식욕이여
하늘 종일 무너지며 당도한 이 곳은
어느 봄날의 저녁인가, 밤하늘 가득
양파처럼 흩뿌려져 있는 떠돌이별들
씹으면 모래알로 부딪혀 오는 이빨 속 사막이여
내가 사막이니, 그대인들
식초같은 비 내리면
아 이곳은 어느 봄날의 저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