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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타자의 시선

[스크랩] 표현주의 무용의 조용한 별 피나 바우쉬

 

음악, 연극, 오페라, 영화계의 조용한 별.

종합예술 분야에서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던 여성이 있으니

바로 여성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이다.

 

2009년 6월 30일 암선고를 받은 후 5일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세계 공연계에 큰 슬픔을 안긴 그녀.

그녀의 삶과 예술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다보면 이 세상의 많은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다.

 

독일 출신의 무용수, 탄츠테아터로 유럽 무용계를 장악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피나 바우쉬는 졸링겐(Solingen)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레스토랑이 딸린 여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늘 바빴다. 이에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피나는 식당의 음악과 함께 춤을 추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춤 솜씨를 가지고 있던 피나는 에센의 폴크방 스쿨(Folkwang School)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쿠르트 요스(Kurt Jooss)가 이끄는 학교이다. 쿠르트 요스는 탄츠테아터(Tanztheater)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헝가리 출신 무용가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의 제자이다.

 

탄츠테어터는 영어로 ‘Dance Theatre’, 말로 무용과 연극을 결합한 것으로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된 양식이다. 기존의 고전 발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아름답고 정형화된 동작에서 벗어나 무용에 있어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는 기법이다. 피나는 폴크방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비로 미국 줄리어드 스쿨에서 유학을 한다. 유학 후 그녀는 표현주의를 독일을 넘어 유럽 무용계 전반에 퍼뜨리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조로서 뿌리내리게 한다. 


 
<피나 바우쉬가 무용을 공부했던 폴크방 스쿨>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투어를 하는 무용단의 지도자

 

2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그녀는 처음에는 폴크방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다 1968년, 헝가리 작곡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의 곡을 바탕으로 안무한 <단편(Fragment)>을 통해 안무가로 데뷔한다. 이듬해 <시간의 바람 속으로(Im Wind der Zeit)>로 쾰른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쥐며 안무가로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드디어 1973년, 부퍼탈 시립공연장 발레단의 예술 감독 겸 안무가로 취임함과 동시에 무용단의 이름을 ‘부퍼탈 탄츠테아터’로 개명하면서 세계 무용계를 뒤흔든다.


이 무용단은 1973년부터 <프리츠(Fritz)>와 댄스 오페라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e auf Tauris)> 두 작품을 시작으로 공연을 하고, 1977년 첫 해외공연을 한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파리와 아비뇽 페스티벌을 거쳐 2009년 칠레를 소재로 한 마지막 작품을 공연할 때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투어를 하는 단체로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해외에 갈 때마다 피나 바우쉬 열풍을 일으키며 아무리 러브콜을 외쳐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에는 가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전 세계 어떠한 무용단보다 더욱 다양한 구성원들을 자랑한다. 무용수 20여 명의 출신국이 무려 16개국이나 된다. 갓 스무 살이 넘은 어린 무용수부터 환갑을 바라보는 무용수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무대에 서기도 한다. 피나는 이들의 개성을 전부 무대에 쏟아 넣는 것이다. 피나는 항상 이야기했다. “나는 무용수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보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피나의 무용주제는 항상 ‘인간’이었던 것이다. 피나는 완결된 개념을 가지고 안무를 짜는 대신 수많은 질문과 아이디어를 단원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반영했다.

 

40년 가까이 혁신적으로 평가 받는 작품

 

피나는 2009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무용단을 위해 총 마흔 두 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피나의 가장 유명한 1978년의 작품인 <카페 뮐러(Cafe Muller)>는 초연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그녀가 어린 시절 식당에서 보고 느낀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연극, 음악, 무대 미술, 무용, 의상, 소품 등 통합 예술장르로 표현한다. 흙과 물, 잔디와 꽃, 살아있는 동물 등 관객의 상상을 뛰어 넘는 소재를 이용한 획기적인 무대는 그녀의 작품 특징이다. 무대에는 발목까지 찰랑거릴 정도로 물이 차거나 붉은 꽃잎이 산처럼 쌓이고,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이 무대를 덮기도 하며, 모래사장 위에는 난파선이 등장하기도 한다. 2004년 일본 사이타마 극장과 공동 제작한 <천지(Tenchi)>에는 거대한 고래 꼬리가 등장한다.

 

무용으로 표현한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여성 차별 이야기

 

피나 바우쉬의 작품이 처음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 안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 인간의 폭력성과 정치적 모순 등 사회비판적 이슈가 담겨있다. 이에 어떤 평론가는 ‘자기도취적 안무가’라고 피나를 폄하하기도 했고, 화가 난 관객이 공연 중간에 객석을 박차고 나가거나 야유와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는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었고, 혁신을 원하는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나 바우쉬와 그녀의 발레단들>


담당자 면접을 통해 마음이 동해야만 기꺼이 공연을 하는 피나 바우쉬는 한국을 좋아해 2005년 이후 매년 방문, 5번이나 내한공연을 했다. 세계 각국에 2주 이상 장기 체류하면서 그 곳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 피나가 느낀 한국. 그녀의 한국은 아름다운 산세를 가진 곳, 하지만 빠른 변화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접촉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소통을 갈망했다.

 

그녀는 이러한 느낌을 <러프 컷(Rough Cut)>에서 표현한다. 무대 뒤를 가득 덮은 거대한 흰 암벽 위의 네 명의 등산객이 힘겹게 오른다. 사나운 독일 셰퍼드가 짖어대고, 양이 고요히 배회하며, 살아있는 닭이 수박을 쪼아 먹고, 무용수들은 뒹군다. 그녀가 바라본 한국인들은 지금도 그녀의 공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느끼고, 소통을 꿈꾼다. 세계 무대에서 세계를 소재로 한 공연을 했고, 수 십 년 전의 작품도 공연되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은 모든 인간이 표현하길 갈망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녀의 대표작은 그녀가 없는 지금도 계속 공연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것이다.

 

사진 위키디피아
en.wikipedia.org/wiki/File:Pina_Bausch.jpg
en.wikipedia.org/wiki/File:Essen_Kloster_Werden_Innenhof_2_2005.jpg

 

글,사진 │ 위민넷 위민기자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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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가족부
글쓴이 : 여성가족부플러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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